비닐봉지나 플라스틱 재료로 많이 쓰이는 폴리에틸렌(PE). 최근 과학자들은 의류를 만드는 소재로 폴리에틸렌 섬유에 주목하고 있다. 수분 흡수와 증발력을 개선하면 우수한 의류 소재로써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스베틀라나 보리스키나 박사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네이처 지속가능성(Nature sustainability)’에서 “폴리에틸렌의 특성을 살린 직물이 기존 의류 소재의 환경과 지속성 문제를 다소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다.
MIT 연구진이 설계한 폴리에틸렌 직물. 연구진은 기후변화로 인한 온실가스 감소와 환경오염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Svetlana Boriskina, Felice Frankel, Christine Daniloff, MIT
섬유 폐기물은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왔다. 미국 환경보호국에 따르면 2017년에 미국에서 발생한 1690만 톤의 섬유 폐기물 중 약 15%만이 재활용되고, 나머지는 소각되거나 매립된 것으로 추정했다. 폐기되는 섬유가 발생시키는 온실가스 배출량은 최대 10퍼센트를 차지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MIT 과학자들은 인류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물질 중 폴리에틸렌에 관심을 뒀다.
물과 땀 흡수능력 높아…의류 소재로 활용 가능
폴리에틸렌 섬유는 폴리프로필렌 섬유에 비해 가볍고 산과 알칼리에 견딜 수 있지만, 수분 흡수가 어렵다는 이유로 밧줄이나 어망 등의 소재로만 쓰였다. 보리스키나 박사는 “폴리에틸렌으로 제작한 직물은 열 투과성이 높아 시원하지만, 물과 땀을 흡수하지 않아 그동안 의류에 사용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폴리에틸렌 직물이 수분 흡수가 어려운 원인 중 하나는 수분에 대한 소수성 때문이다. 연구진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폴리에틸렌 섬유를 용융방사 공정으로 직접 제작했다. 중합체를 용융점 이상의 온도에서 녹여 작은 방사 구멍으로 압출 후 냉각시켜 섬유를 뽑아내는 방식이다. 특이하게도 압출 공정 과정에서 폴리에틸렌이 산화되면서 섬유 표면이 약한 친수성으로 바뀌어 물 분자를 표면으로 끌어들이는 현상을 발견했다.
또, 두 번째 압출기를 사용해 폴리에틸렌 섬유를 함께 묶어 직조 가능한 원사(原絲, 직물의 원료가 되는 실)를 만들자 섬유 사이 공간으로 수분이 끌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연구진은 흡수능력을 최적화하기 위해 폴리에틸렌 섬유의 특정한 직경, 실 조성 등의 조합을 알아내 모델링을 만들었다.
연구진은 압출기를 사용해 폴리에틸렌 섬유를 함께 묶어 직조 가능한 실을 만들었다. (사진은 연구 내용과 무관함) ⓒ게티이미지뱅크
그리고 모델링을 기반으로 최적화된 섬유 배열과 수치를 활용해 원사를 엮어 직물을 만들고, 흡수능력을 측정했다. 결과는 일반적인 면, 린넨, 폴리에스터 등과 비교해 높은 흡수율을 나타냈다.
특히, 폴리에틸렌 직물은 습기에 반복적으로 노출될수록 물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감소하지만, 신체와 마찰, 세탁, 자외선에 노출되면 친수성을 다시 회복하는 현상을 나타냈다.
건조 능력도 높았다. 직물 표면에 흡수한 물의 건조율을 측정하니 다른 직물보다도 더 빨랐다. 연구진은 “폴리에틸렌 직물로 수분이 운반된 후, 물방울이 빠르게 증발 표면을 최대화하면서 효율적인 증발 현상을 보였고, 젖은 부위와 맞닿는 피부는 비교적 균일한 온도분포를 보였다”고 했다.
착색, 직조에 드는 에너지 적고 재활용 가능
폴리에틸렌은 구조상 수소원자로 둘러싸인 탄소 골격으로 이뤄졌다. 전자가 균등하게 분포해 극성을 띠지 않아 얼룩이나 먼지 등에 취약한 일반 섬유와 달리 오염에 강하다. 연구진은 각각의 여러 재질의 천과 폴리에틸렌 천에 상업용 착색제를 묻히고 수돗물에 헹궜다. 얼룩이 남는 다른 천들과 달리 폴리에틸렌 천은 얼룩이 완전히 제거되는 현상을 관찰했다.
하지만 오염에 강하다는 사실은 착색이 어렵다는 의미기도 하다. 연구진은 폴리에틸렌 섬유를 제조하는 동안 용융방사에 착색제를 삽입하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이 방식은 물을 사용하지 않고, 섬유 내 착색제를 가두는 형태이다. 보리스키나 박사는 “섬유를 화학물질 용액에 담가 염색하는 전통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완전히 건조하는 방식으로 폴리에틸렌 섬유를 염색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수명주기가 끝난 폴리에틸렌 직물은 녹인 후 원심분리하고 입자를 회수해 재사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환경보호국에 따르면 미국에서 매년 평균 1500만 톤 이상의 섬유폐기물이 발생하고, 그 양은 지난 20년 동안 두 배로 증가했다. 또, 분해하는데 약 20년에서 200년 정도 걸릴 것으로 추정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러한 폴리에틸렌의 물리적 특성과 섬유 제조와 착색 시 필요한 공정을 고려하면 직물 생산에 드는 에너지를 상당히 줄일 수 있다. 또, 실을 만드는데 용융점이 낮아 가열에 드는 에너지, 세탁과 건조 등에 쓰이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줄일 수 있다. 연구진은 폴리에틸렌 섬유가 의류 산업에 상용화되면 환경발자국(Environmental Footprint, 인간이 지구에 남기는 환경 영향력 지표)에 이바지할 수 있어 기존 섬유 폐기물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폴리에틸렌 직물의 상용화에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영국 리즈대학에서 패션산업을 가르치는 마크섬너 박사는 B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폴리에틸렌 섬유가 착용감, 편안함 등 소비자의 기호에 얼마나 잘 들어맞느냐이다”라며 “원단이 뻣뻣해 불편하다면 소비자는 제품을 구매하지 않아 제한적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흡수와 건조 능력이 높아 전문 스포츠 및 레크리에이션, 농작업, 군인 등 야외활동이 많은 의류에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폴리에틸렌이 우주의 엑스선 복사를 차단하는 성질을 이용해 우주복에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